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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여우(千年女優, millennium actress, 2001) - 배우는 형식을 대변한다

바평 2015. 12. 25. 03:52




천년여우 여우비와 많이들 헛갈리지만 Fox의 여우가 아니라 actress의 여우다.


나도 처음에 천년여우 여우비인줄 알았다


덕분에 서동욱 교수님의 들뢰즈 해설서에서 천년여우에 대한 서술이 나왔을때 어리둥절 했었다


물론 그게 매력적이었으니 찾아보기도 했지만.


서동욱씨 책을 읽고 정말 감탄했는데


거기에 인용된 이 영화를 보고 또 감탄했으니 서동욱씨가 참 좋다


아 개인적으로


덕후적인 캐릭터성을 파는 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고(물론 이것도 좋다. 나는 좋아한다)


이 영화만한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없는거같다.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보면서 저런 장면을 실사 영화에선 어떻게 연출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만든 장면이 몇 있었다.



1. 형식의 극한


이 영화는 형식에 의한 형식을 위한 영화다. 


형식 중 종류를 굳이 가르자면 액자식 구성인데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마냥 액자 속에 액자가 있고 그 액자 속에 액자가 있는게 수도 없이 반복되는데다


액자 자체와 현실의 경계도 흐려지고 초현실적인 분위기까지 띄게 된다.


들뢰즈 이론을 설명하며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미스터 노바디, 클라우드 아틀라스와 비슷하게 이야기가 많지만 전자 두개가 천년여우에 비하면 꽤나 선형적이고 장식 없이 느껴질정도로 천년 여우는 그 형식이 복잡하다.


허나 딱히 그 형식을 분석 하진 않겠다. 그 오묘한 형식 자체가 묘미다.


나도 고등학교때 액자식 구성이 한 10개쯤 겹쳐지는 단편을 쓴 적이 있었는데 그것과 비슷하기도 하고


판타지 중에 따지면 오트슨의 '갑각나비'와 비슷하다.


잡설이 길어졌는데 


이 영화는 형식이 아름다워서 그냥 그것만 두고 봐도 된다.



2. 내용과 형식의 유기성


천년여우의 내용은 '어떤 남성'을 쫓는 여성 배우 '치요코'의 이야기.


치요코는 한 평생동안 어떤 남성을 추구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이루어지지는 못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남성의 얼굴도 까먹고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고 그 실체를 거의 잊게 되는데


끝까지 실낱같은 파편을 억지로 부여잡고 살아간다.


모든 이야기들은 치요코가 그 남성에게 '달려가면서' 이루어진다.


그러다가 치요코는 결국 그 남성을 잃었음을 인정한다


허나 눈물을 흘리기도 하던 그녀는 행복하다고 말하는데


'그 남성'을 쫓아가는 자기 자신이 좋았다는 것.


비유가 확 드러나버리는데


그 남성이 본질이고 실체라면 그 남성을 쫓아가는 행위와 치요코는 형식이다.


전적으로 형식을 찬양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배우에겐 내용이 없다. 


배우는 껍데기만 빌려준 채 내용은 계속해서 바뀌는 전적인 형식의 존재이다.


그러한 배우의 삶, 형식 자체가 즐겁기 때문에 좋다는 것.



3. 어찌보면 진부한 결론


그런데 이 영화 전체가 찬양하고 있는 형식이 또 무엇이냐고 한다면


우리 인생이다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나.


삶이 뭔지 진리적으로 모르겠고


목적론적으로 왜 사는지도 모르겠는데


우리는 어쨌든 산다는 '형식'하나만큼은 확보하고 있지 않나(상당히 데카르트적이다).


뭐... Carpe diem 적인 그런 결론이 나게 되는데


이렇게 언어로 추상화 해놓으니까 정말 재미가 없다.


하지만 예술의 형식으로 구체화 되어있는 것을 감상하는 것은 감정을 불러 일으키니


사실 천년여우 자체가 결론을 필요로 하지도 않아 보인다.


진실(결론)을 알지 못해도 즐거울 수 있으니까.


형식(삶) 자체를 나르시시스트 적으로 좋아하면 되니까.



4. 초현실적 구성의 놀라움


형식 얘기하다가 잠깐 쓰고 넘어갔는데 이 영화 보면서 놀란 장면이 몇 개 있다


현실과 과거를 넘나들며 이야기가 구성되는 부분에서


취재하러 간 치요코의 팬이 그 극중에 개입하는 장면을 아주 스무스하게 연결시켜


과거와 현실을 이어버리는데


개인적으로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어디부터 현실이고 어디부터 극중인지도 알 수 없고 혼란스러운 형식..


보르헤스 읽는줄 알았음.

 

그 와중에 조연출이 실질적인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거 영화 만든 사람들은 꽤나 영화매체에 대한 사랑이 넘치나 보다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