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리뷰가 쓰고 싶어지는 영화'를 봤다 싶다. 클라우드 아틀라스 이건 영화 자체가 굉장히 원초적으로 끌렸다. 너무 어렵지 않게 적당한 철학적 클리셰들과 복잡하지만 분석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정도인 신선한 이야기 전달 구조가 딱 내 스타일이었다는 얘기다.



 1.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온몸 온세포로, 그야말로 모든 씬 모든 내러티브 모든 장치가 어떠한 저항과 반항을 외치고 있다. 여러가지 스토리가 피카레스크 식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거시적 대주제나 미시적 소주제나 똑같은 방향으로 소용돌이 치며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행동하라. 지금, 저항하라!"

그 저항의 대상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본질적으로 본다면 공통적인 하나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여러가지 시점의 내러티브들이 겹쳐지는 영화의 특성상 그렇다. 대충 꼽아만 봐도 가정권위(아버지)에 대한 반항, 신의 권위(예언)에 대한 반항, 체제(거시적인 사회시스템)에 대한 반항, 전통적 애정상(이성애)에 대한 반항, 제도(노예제도)에 대한 반항 등등 수도 없다.

1830년, 1870년, 1930년, 1970년, 2012년, 2144년, 먼 미래 모든 이야기들이 각각의 시기마다 반항했던, 혹은 반항해야 했던, 혹은 반항해야 할 대상의 타도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선동적이지만 그 안에는 피를 끓게끔 만드는 긍정적임이 있다.



 2. 이와 같이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보여주는 끝없는 저항 정신은 작품의 특이한 내러티브 구조에 내포된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과 만나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부여해주려 시도하는 것 같다. 니체가 말했듯이 우리네 인생의 행동, 지금 이 순간의 결정은 수도 없이 반복되는 인생에 계속해서 되풀이 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것이 어떤 윤리를 내포하는 불교나 선교 도교적인 신앙론은 아니라고 본다. 워쇼스키 형제는 인터뷰에서 'Seoul'을 주 무대로 설정한 이유가 'Soul'과 발음이 비슷해서라고 말하며 종교적인 뜻을 비쳤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작품 자체 내에서 종교는 오히려 부정되는 편이다. 손미의 생이 예수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같은 관점에서 그냥 평범한 영웅화 클리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품 내에서 이해하기 쉽게 다가오는 것은 각각의 에피소드들에 나타나는 인간들의 미시적인 선택이다. 이들은 생 내에서 각각 죽음을 알고 있으며, 그렇기에 희망을 얻고 행동할 수 있다. 바로 끝이 있기에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는 실존주의적 인간, 사르트르가 휴머니즘이라 말했고 까뮈가 시지프의신화에서 이야기하는 반항하는 인간이다. 까뮈는 우리가 죽음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자유러워지고, 행동하는 반항이 되고 열정을 가진다고 쓴다. 단테는 신곡의 지옥을 묘사하며 '죽음의 희망도 가질 수 없기에 더욱 절망적인' 이라고 묘사한다. 우리가 죽음을 아는 순간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모든 것에 반항할 수 있다.



 3. 하지만 작품 내에서 이러한 반항은 너무 성급한 환경 예찬과 문명 비관, 자연 회귀론, 감정 긍정론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충동적이고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행동들이 긍정적인 귀결을 가져오는 모습들이 보여진다. 시작 부분 작가의 비평가 살해나 상선 안에서 흑인 노예를 구해준 변호사, 부족인을 구해준 먼 미래의 인간들이 그렇다. 가족애나 우정, 동정등의 일차적인 감정들이 나쁜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이유에서 나타나는 반항은 마치 성숙된 논리의 귀결이 아니라 충분히 사회화되지 못한 청소년의 맹목적인 불순응과도 일견 상통하는 바가 있는 듯 보이기 때문에 스토리의 기반이 부실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배두나의 에피소드(2144년 메가서울)에서 배두나가 진정 사회의 불합리를 깨우쳐서 목숨을 걸고 방송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장태주와 사랑에 빠져서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뜻이다. 단지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원시적인 충동으로 행동하는 것을 예찬한다면 그것은 억압자의 이기주의적 입장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저항이 맹목적 저항이 되지 않게끔 작품이 전개되어 다른 가치를 내세워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물론 짧은 영화에서 원초적 감정 이외의 진리적인 가치를 내세우기는 아주 힘들겠지만 말이다.

계속해서, 작품 내에서 원자력 회사의 음모나 물에 잠긴 서울과 그곳에서 진행되는 끔찍한 디스토피아, 환경 파괴로 멸망해 지구를 떠나는 인류를 연관시켜 에코 옹호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싫어하는 패턴이다. 사실상 지구 온난화의 이유가 인간의 탄소 사용이라는 것에 대한 명확한 개연성마저 없는 와중에 정교한 논리 없이 이미지만을 연쇄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일종의 선동이기 때문이다. 환경파괴와 디스토피아를 번갈아 보여주면서 환경파괴=멸망, 지옥이라는 감정적 느낌을 심어주는 것은 원시적이고 주술적인 샤머니즘이고 황금가지에서 말하는 미개인의 이론적 신화일 뿐이다.



 4.스토리와 영화 자체적인 측면과는 별개로 배우들의 분장이 참 재밌었다. 같은 배우가 여러 이야기에서 각각 다른 인물로 분장하여 출연하는데(분장의 혁신으로 남-녀나 황인-백인이 뒤바뀌기도 함) 같은 배우가 비슷한 심상을 환기시키는 것이라고 가정하고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다가 정 반대의 스탠스를 지닌 인물이 같은 배우인 경우도 있어서 중간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또 서울의 등장과 배두나의 급작스런 등장도 재밌었고. 배두나나 서울 나오는건지 전혀 모르고 봤음.


결론적으로 항상 극좌의 극 좌를 표방하는 내게 있어 이렇게나 강렬하게 저항하라고 외치는 영화는 참으로 입에 달았고, 특이한 연출과 각본이 믹스돼 또한 신선했다. 좋다.




2014.09.26


오랜만에 썼던 리뷰를 편집하며 다시 보니까 브라이언 마수미가 떠오른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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