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진과 한은 대통일 이후 정치상으로나 사회상으로나 각종 신제도를 따로 정립하고자 할 때에도 유자(儒子)의 힘을 빌려야 했다. 유자는 이전의 전적에 통달하고 있었고, 이전의 제도에 밝았고 또 공자 이래로 원래의 제도에 부여한 각종 이론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다른 학파들은 정치, 사회 철학이 있기는 했지만 정치와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방책이 없었고, 또 있어라도 유가만큼 완전하지는 못했으므로, 진한의 대통일 이후 저 "건설의 시대"에는 당연히 유가에 필적할 수 없었다.


*사회의 건설은 교육과 불가분하다. 유가와 다른 학파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교육"측면에 있었다. 특이하게도 다른 학파에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교육"의 개념이 사실상 전무했다. 

엄격히 말해서 교육에 관한 한, 도가의 경우 무엇을 건설하려는 적극적인 의지 자체를 부정하는 만큼 기존의 인식체계에 대한 철저한 비판 외에 아무런 대안이 없었고, 

묵가의 경우 이미 완결된 묵자의 절대적인 가르침(교조)을 실천하는 단체 내로 포섭하는 설득의 일이 있을 뿐이었고, 

법가의 경우 법률 조문을 숙지시키는 일이 있을 뿐이었다. 

이 세 학파 모두 난세 속을 부침하는 구체적 인간(특히 지식인 계층)의 실망스런 모습으로부터 나아가 인간성 자체에 대한 좌절의식을 근저로 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도가는 사회에 대한 좌절의 철학이라면, 묵가와 법가는 개인에 대한 좌절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 개념"의 부재는 이 사실과 상호 반증이 된다. 유가 역시 구체적 인간의 모습에 실망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인간성에 대해서는 한없는 신뢰와 가능성을 보았다. 그런즉 유가는 인간을 특정 사상체계에 입각한 비판과 포섭(설득)과 단죄의 대상이 아닌, (각 개인의 덕성과 능력을 개발시키는) "교육"의 대상으로 보았다. 이처럼 다른 학파들은 한 국가사회의 주도적 이념이 되기에는 이미 개인과 사회에 대한 이해 자체에 미달해 있었던 만큼, 철학사적으로 "유가의 독존"이란 사실상 "사상대결상의 승리"의 의미가 아니라 "유학의 관학화"또는 "사상의 고착화"의 의미가 컸다. 


중국철학사 上 - 풍우란, p643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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